요즘같이 더운 땐 눈이 아주 많이 온다는 일본의 삿포로가 등장하는 여행 에세이 한 권 어떨까요.

방금 산 아이스크림이 눈앞에서 녹아버릴 만큼 더운 요즘, 계절이 정 반대라 지금 한창 서늘한 남반구의 나라에 놀러 갈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릴 때, 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캐롤을 듣곤 합니다. 캐롤을 듣고 있으면 추웠던 작년 크리스마스, 행복했던 제작년 크리스마스, 우울했던 10년전 크리스마스가 한꺼번에 몰려오는데, 그런 기억 덕분에 아주 조금은 체감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거든요. 요즘같이 더운 땐 눈이 아주 많이 온다는 일본의 삿포로가 등장하는 여행 에세이 한 권 읽으면 어떨까요.
언제부터인가, 서점에 가면 항상 소설 섹션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르면서 책을 들춰보고 꺼내보고 하던 것이 이제는 여행 에세이 섹션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체적인 여행정보를 담고 있는 책 보다는 작가의 감성과 경험이 담긴 책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사실, 많은 책들이 개인의 감성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던 적이 많았어요. 뭔가, 공감을 이끌어내기엔 약간 아쉬운 감성, 글, 깊이.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평범한 여행 에세이들. 단순히 저와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묵직하게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그것이 여행이라는 다소 특수한 상황과 어우러져(물론 어떤 이에게 여행은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들 삶 그 자체이지만) '여행 에세이'라는 장르에 걸 맞는 알찬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찾아보기는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고, 뭉클하게 만드는 잘 만들어진 책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발견한 오래된 보석. 이병률씨와 그의 책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소개합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제목이 당신, 좋다 어쩌구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사랑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바람이 부는데로, 마음이 가는데로 여행을 다니는 자신과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가 사랑한 풍경들, 이야기들,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은 어떤 기억들을 담아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아 이 사람은 이런 색의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이래서 여행을 가는구나. 이런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내 안의 기준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이병률이란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글쓴이가 만났던 아직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좋았어요.

또 한 사람은 내가 메고 다니는 배낭의 브랜드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너, 콜롬비아에서 왔구나." 나는 한국에서 왔고 이건 단지 가방 브랜드일 뿐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왜 이렇게 콜롬비아에서 온 여행자들이 많지?' 싶었다면서 그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34# '조금은 바보 같아도 좋다' 중.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혼자 얼마나 웃었던지. 그들의 순수함 혹은 ‘바보같음’이 너무 예쁘게 보이고 너무 부러워서요. 조금 바보 같으면 어떤가 싶었어요, 그들은 내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이제는 다시 찾을 수도 없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요즈음, 사람들은 순수한 것을 좋아하지만 바보 같은 것은 못 견뎌한다고 하죠.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남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조금 더 깨끗하게, 조금 더 배려하면서 산다고 해도 큰일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런 삶의 태도가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고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나와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주지 않고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준다면 그게 더 현명하고 똑똑하게 사는 길 일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에피소드로는 16# '쓸쓸히 왔던 길'도 참 좋고, 또, 분홍이라는 색에 관한 단상 25# '지랄이다'도 참 인상 깊어서 추천하고 싶어요. 그가 바라보는 분홍과 내가 생각하는 분홍이 조금은 다르긴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분홍에 관한 이야기가 참 흥미롭거든요 더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하지만, 색을 가지고 이렇게 구성지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글솜씨도 참 부럽더라구요.
혹시 로맨틱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챕터는 11#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한 글자 한 글자를 액자에 담아서 걸어두고 싶을 만큼 좋은데, 이 책에서 유일하게 러브스토리 ‘같은’ 부분이고, 책 제목과도 참 잘 어울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요.

우리 천 살까지 만나 살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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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절망한 것을 사과할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언뜻 봐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지만, 잘 뜯어보면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오래오래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 작가에게는 그것이 사랑인가봅니다. 가장 사랑하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하얀 눈 속에 부끄러움, 죄스러움, 미안함도 다 덮어둘 수 있는 곳에서, 오롯이 서로를 향한 마음만 꺼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곳으로의 안내. 마음이 훈훈해지고 발그레해지는 글이었어요.

그의 말대로 이병률, 그는 슬픔의 색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겨울이 어울리고 눈을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사람이고요. 그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것은 자신 안의 슬픔을(더위도) 삭히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위로 받고 싶은 날, 속에 열불이 나는 날, 그냥 더운 날 그의 책을 읽으며 마음에 부채질을 하는 건 어떨까요.

Posted by sangh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