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4NET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역사 본문

E4.Tech/Localization/Globalization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역사

E4. 2020. 10. 22. 09:53

 

올해는 창립 25주년인 해입니다.

우리가 코로나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해외 워크샵을 계획하느라, 다들 비치웨어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조금은 들떠있었을 시기였을 테죠.
마스크를 쓰고, 여행은커녕 친구들과의 만남도 조심스러운 요즘을 보면 정말 세상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사업부도 IT사업부도 이제는 오래된 사람들보다 새로운 사람들이 더 많아서, 25년이라는 이포넷의 역사가 그리 다가오지도 중요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언사부 직원들도 언사부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제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고, 일은 그냥 일일 뿐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기억이 왜곡과 미화로 덧칠되기 전에, 치매가 오기 전에 이 지면을 빌어 제 기억과 경험에 아직은 남아 있는 언사부의 역사를 그냥 한 번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대단할 수도 있는..(저 말고 언사부와 이포넷이) 더 많은 사진 자료를 넣으려고 했지만 저의 흑역사가 드러나서 최소화했습니다. (스압 있음)

p.s. 연도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ㅎㅎ

1998년 10월 이포넷을 알게 되다
4-5개의 회사를 발주고객으로 모시고, 삐삐를 차고 하루 12시간씩 프리랜서로 일하던 중 이전 회사의 팀장이 자기가 있는 회사에 번역사로 일해보라고 해서 이포넷도 내 고객이 되었다.
(라떼는 말이야: 삐삐로 호출이 오면 번역회사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일을 받는 시스템이었는데, 핸폰이 없던 시절이니, 빨리 연락해서 일을 받기 위해서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았음)

그해 겨울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Office 도움말 Linguistic Testing을 해야 하는데 꼭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고 해서. 일산에서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3시간 걸려 정자동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일했다. 그 때 처음 한양족발 2층 사무실을 보았다.
그 뒤 마이크로소프트에 파견할 직원을 찾는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지원했고 그렇게 이포넷과 인연을 맺다.

2000년 1월 Windows를 번역하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Windows 95, 98에 이어 대망의 신버전인 Windows Me(Millennium)와 전문가 버전인 Windows 2000을 개발 중이었다.
도움말은 바깥의 번역 회사가 하고, 프로그램 UI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팀에서 번역을 직접 진행해왔지만, 최초로 이 번역을 번역회사의 파견 직원을 통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진행하기로 했고, 이포넷은 이 작업에 선택된 최초의 번역회사였다.
dll, ocx, msg, exe 파일들을 직접 번역, 수정하고 loc build를 다시 컴파일하여 OS를 수십 번, 수백 번 설치하면서 UI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그 6개월은 우리 팀에게는 신세계였고, 이 경험은 이포넷의 보물 같은 자산이 되다.

Windows Me 번역 프로젝트는 고객-벤더 협업 체제의 성공적인 결과물이라고 평가받았으나, 제품에는 하자가 너~무 많아서 곧 단종되는 아픔이......

2001년 그 유명한 님다(Nimda)
Windows, Office, Internet Explorer, SQL Server, IIS Server 등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국어 전담 벤더로서 승승장구하던 이포넷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납품한 도움말 zip 파일에서 님다(Nimda) 바이러스가 검출되면서 한순간에 계약 해지를 당헸다.

2002년 세계는 넓고 고객은 많다
최대 고객을 잃은 우리에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고객들이 보이기 시작하다. TOIN, HP, SONY, ISS, Borland, Lionbridge, IC,.. 등 세계는 넓고 고객은 많았다.
TOIN과는 Office, Sun, Mapinfo를, HP를 통해서는 UNIX 번역을, Sony Japan을 통해서는 한국 출시 VAIO 노트북의 빌트인 프로그램 번역을...
어쩌면 이 시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더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TOIN은 그 후로 이포넷의 제2 전성기를 함께 한 오랜 파트너가 되었고, HP, Sony 역시 지금까지 변치 않는 우리의 고객이 되었다. 이제 스즈끼는 GI Japan을 창업해 우리 고객이자 파트너이며, 크리스토퍼는 Welocalize Japan 지사장을 지내다가 이제는 글을 쓰고 있다.

2003년 겨울 체코에서 온 손님
체코에서 영화배우 같은 남녀가 우리를 찾아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작업을 하는데 한국어를 담당할 벤더를 찾는단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방금 영화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국적인 외모와 큰 키의 남녀가 불쑥 찾아왔던 그 날을...
(라떼는 말이야: 삼성동이나 강남역에 와야 외국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던 시절이라, 그것도 국적을 구분할 수 없는 '외국인'. 슬라브인을 직접 보는 건 정말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음)

마이크로소프트의 벤더 정책이 바뀌면서 이제는 로컬의 번역 업체와 직접 일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큰 번역업체에 언어별로 외주를 주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
각 업체는 도리어 이전에 MS 작업을 했던 qualified vendor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파트너였다.

“우리 잘렸는데 너네 그거 알고 왔니?”
“응, 알고 있어. 근데, 다 괜찮대. 이제.”

이렇게 파트너가된 모라비아는 Windows Vista, Windows 10, Windows Server, SQL Server, Windows CE, Windows Phone, Exchange Server, Internet Explorer 등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핵심적인 제품군을 지난 10여 년간 함께 작업했다.
2006년 Vendor Summit을 시작으로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의 벤더를 초청하여 프로젝트별, 고객별, 벤더별 미팅과 평가를 진행하고 한 해의 마이크로소프트 작업에 대해서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모라비아에게 MS는 큰 고객이었고 우리에게도 모라비아는 큰 고객이었으며, 2017년 영국회사인 RWS에 인수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최대의 고객이다.

<2006년 Vendor Summit: 모라비아 창업자 카트리나와 그의 딸로 추정되는 안나>

2007년 구글 작업을 시작하다
갑자기 Welocalize라는 회사가 나타나더니, 전 세계에서 여기 저기 회사를 인수하고서는 연락이 왔다. Google 프로젝트를 할 벤더를 찾는데 테스트를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두 고객으로부터도 Google 테스트를 받았고, 모두 통과했다. Google에서 전 세계 4개 벤더와 계약을 맺었는데, 우리는 그 중 3개 벤더의 한국어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것이다.
Gmail이 생소하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Google의 메인 한국어 벤더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9년 아이폰이 출시되다
Windows 밖에 몰랐던 우리 회사에 Apple 작업이 오다. 당시 아이폰의 UI는 매킨토시 총판을 하던 회사가 하고 있었고, 한국 출시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고객 지원을 위해 상담사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NAT, CCT라고 부르는 이 작업은 New Agency Training, Contact Center Training의 약어로, 지금도 TOIN, RWS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2013년 페이스북에서 온 연락
담벼락(Wall)에다 글을 쓰면 친한 사람끼리 볼 수 있다는 페이스북이 슬슬 유명세를 탈 즈음. 페이스북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작업을 한참 할 때 우리와 함께 일했던 MS 직원이 페이스북 본사에서 AP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데, 현재 한국어 벤더가 맘에 들지 않아 우리와 일하고 싶단다.
Why not? 지금 여러분이 쓰고 있는 페이스북은 모두 우리 회사가 번역한 것입니다.

IKEA, Uber, Netflix, Tripadvisor, Amazon…
그 후로도 한국에 첫 출시하거나, 본격적으로 시장을 공략하려고 할 때마다 이포넷은 항상 early adapter처럼 가장 먼저 한국어 자료를 번역하는 작업을 맡아왔다.
IKEA의 첫 한국어 카탈로그는 우리 팀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작품이었고, Uber나 Netflix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하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과 시련이었다.
IBM, Oracle, SAP, HP, MS 같은 전통적인 IT 회사들이 시장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는 데 따라 우리 작업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자기자신을 자랑스러워하자
이제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지금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모두의 Professionalism과 서비스 정신과, 뛰어난 역량과,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면 이 모든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늘 준비가 필요하다
AI에 필요한 말뭉치 번역, 발화문 작성, 음성 필사 작업 등 번역의 서비스 범위도 이제는 넓어지고 있다.
이게 번역작업이야?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하는 물음으로 우리를 좁은 틀에 가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더 좁아질 것이다.
코로나 시대, 언택트 시대가 열리고 있는 지금, 10년 뒤 이 뒷장을 채우기 위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0 Comments